지난 20일 서울 용산역 4층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고장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인버터 고장으로 운행 중지 중"이라는 문구 아래 완료 예정일은 10월 31일로 적혀 있었다. 이용객들은 50미터를 돌아 동관 에스컬레이터를 찾아야 했다.
21일 서울 용산역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으로 멈춰 선 채 대체경로 안내문만 나붙어 있다. 완료 예정일은 10월 31일로 표기됐다. (사진=교통일보)
고장 에스컬레이터 앞 안내문은 전국 철도역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지난 1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국가철도공단이 관할하는 승강기 가운데 지난해부터 올해 6월까지 하루 이상 운행이 멈춘 장기 고장은 433건으로 전체 고장의 31.1%에 달했다. 군북역 에스컬레이터는 한 번 고장 난 뒤 107일 넘게 멈춰 섰다.
이런 풍경은 서울 지하철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5호선 까치산역 에스컬레이터는 지난 5월 말 멈춘 뒤 한 달이 넘도록 수리가 시작되지 않았다. 고장 안내판 앞에서 계단을 오르내린 이용객 가운데는 어르신과 휠체어 이용자도 있었다.
서울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도 제때 고쳐지지 않는 이유가 단순한 관리 소홀이 아닌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설비가 낡을수록 수리비는 치솟고, 예산은 조기에 바닥나고, 교체는 이뤄지지 않아 설비는 더 빨리 낡아가는 악순환이다. 매일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시설에서 이 고리가 끊기지 않고 있다.
본지가 22일 입수한 서울교통공사(이하 공사) 자료에 따르면 1~8호선 역사 내 운영 중인 에스컬레이터는 2026년 9월 말 기준 1883대다. 이 가운데 내구연한 20년을 넘긴 설비는 647대로 전체의 34%에 달한다. 3대 중 1대꼴이다. 평균 사용 연수는 14.6년이다.
노후 설비의 수리 부담은 신설 설비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년 이상 사용한 에스컬레이터의 유지보수 비용은 새 설비보다 21배 이상 많이 든다. 올해 상반기 중보수 작업의 41%가 이들 노후 설비에 집중됐다. 최근 3년간 고장의 절반 가까이(47%)가 이용객이 밟고 서는 디딤판과 체인·롤러에서 발생했다. 디딤판 파손 장애는 2021년 3건에서 2025년 8월 기준 8건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수리비 급증은 예산 조기 소진으로 이어졌다. 위의 공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고장 수리 및 예방정비를 위해 지출한 비용은 78억1000만원이다. 올해 배정된 에스컬레이터 중보수 예산 55억6700만원을 이미 22억 넘어선 수치다. 올해 6월까지만 해도 연간 예산의 94.1%가 소진된 상태였으며, 이는 작년 같은 시기 집행률(42.8%)의 두 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상반기 예산이 사실상 바닥나자 수리를 기다리며 멈춰 선 에스컬레이터가 속출했다. 올해 6월 26일 기준 수리 대기 중 운행이 중단된 에스컬레이터는 25대에 달했다. 사진은 서울 지하철역 곳곳에 게시된 에스컬레이터 고장 안내문과 서울 지하철 이용 승객들의 모습,
상반기 예산이 사실상 바닥나자 수리를 기다리며 멈춰 선 에스컬레이터가 속출했다. 올해 6월 26일 기준 수리 대기 중 운행이 중단된 에스컬레이터는 25대에 달했다. 7호선 남성역은 5월 18일 고장 이후 6주 넘게 방치됐다. 압구정역·고속터미널역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주요 역에서도 가동 중단이 잇따랐다.
이에 대해 공사는 "상반기에 중대시민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부품 교체에 선제적으로 재원을 집중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예산 집행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추경 계획과 관련해서는 "관련 예산을 추가 확보해 유지보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선제 투자'를 내세운 공사의 설명과 같은 시기 25대 방치라는 현실은 동시에 공존했다.
교체 예산 사정도 다르지 않다. 올해 에스컬레이터 수리 예산으로 사업부서는 145억3200만원을 요청했지만 실제 배정액은 55억6700만원으로 요청액의 38% 수준에 그쳤다. 2025년 공사가 자체 편성한 전면 교체 예산은 0원이었고, 뒤늦게 10억원을 확보해 2대를 교체하는 데 그쳤다. 올해 계획된 전면 교체는 12대 수준이다. 내구연한을 넘긴 647대를 이 속도로 교체하면 산술적으로 53년 이상이 걸린다.
노후화가 심화되는 배경에는 공사의 재정 구조가 있다. 공사의 2025년 당기순손실은 8268억원이며 누적 결손금은 19조7490억원으로 20조원에 육박한다. 무임수송으로 인한 손실만 한 해 4488억원으로 추산된다. 적자가 누적될수록 에스컬레이터를 비롯한 노후 시설 안전 예산은 줄어드는 구조다. 에스컬레이터 불편 민원은 2020년 140건에서 2024년 797건으로 5년 새 5.7배 증가했다.
서울교통공사는 본지의 서면 질의에 "상반기에 중대시민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부품 교체에 선제적으로 재원을 집중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예산 집행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어 "관련 예산을 추가 확보해 유지보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선제적인 예방정비 및 자체점검 내실화를 통해 고장 감소와 고장 조치 기간 단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승안 기자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