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집중호우로 차량 침수 피해가 잇따르는 가운데, 침수 이후의 대응 방식이 차량 안전과 화재 위험을 가르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전기차는 겉보기 이상이 없더라도 고전압 배터리 등 전력 계통 손상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집중호우로 한 중고차 단지 추자장이 물에 잠겨 있다.(사진=연합뉴스)최근 나흘간 중·남부권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이어지면서 주차장과 도로 곳곳에서 차량 침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침수 이후 차량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수리비와 안전 문제는 물론, 화재·고장 위험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운전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특히 전기차의 경우 “물이 빠졌으니 괜찮겠지”라는 판단이 자칫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동차 업계와 정비업계에 따르면, 차량이 침수됐을 때 내연기관차와 전기차 모두 공통 원칙은 ‘시동 금지’다. 물이 빠진 뒤 곧바로 시동을 걸 경우, 엔진이나 모터 내부로 유입된 수분이 치명적인 손상을 일으킬 수 있고, 전기차의 경우 고전압 계통 이상으로 화재 위험까지 커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침수 직후 운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시동을 끄고 견인해 정비소로 옮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내연기관차는 물이 타이어 절반 높이 이상 차올라 엔진룸까지 침수됐다면 통상 ‘전손’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다. 엔진 내부로 물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고, 주요 전장 부품까지 손상됐을 경우 수리비가 차량 잔존가치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침수 정도가 약하다면 엔진오일, 미션오일, 냉각수, 연료 계통을 모두 교환하고, 각종 배선 커넥터를 분리해 세척·건조·윤활 처리를 거치는 방식으로 복구를 시도한다. 경유차는 차체 하부에 장착된 매연저감장치(DPF) 역시 점검 대상이다. 오염물이나 슬러지가 쌓인 채 운행하면 성능 저하나 파손으로 이어질 수 있어, 클리닝 작업이 필요하다는 게 정비업계 설명이다.
문제는 전기차다. 전기차는 구조상 고전압 배터리, 모터, 인버터, 각종 전력 제어 장치가 차체 하부와 곳곳에 배치돼 있다. 제조사들은 배터리 팩을 방수 구조로 설계하지만, 장시간 침수되거나 수압이 가해진 경우 내부로 수분이 유입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침수된 전기차는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내부 전극 간 합선이나 절연 저하로 화재 위험이 뒤늦게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정비업계에서는 “침수 전기차는 완전히 건조된 뒤라도, 제조사 매뉴얼에 따른 정밀 점검을 거치기 전에는 충전이나 시동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고전압 배터리와 케이블, 전력 제어 모듈을 운전자가 임의로 만지는 것도 위험하다. 차량이 침수된 상태에서도 고전압 배터리는 차체와 절연돼 있어 즉각적인 감전 위험은 크지 않지만, 침수 이후 시스템 이상이 발생한 상태에서는 예기치 않은 전기적 사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차 화재 위험은 단순한 기계 고장을 넘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민감한 문제다. 배터리 셀 내부에서 열폭주가 발생할 경우, 일반적인 차량 화재보다 진화가 어렵고 장시간 연소가 이어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침수 이력이 있는 전기차는 외관 손상 여부와 무관하게, 배터리 팩과 고전압 계통을 중심으로 한 정밀 진단이 필수”라고 말했다.
침수 차량의 또 다른 문제는 ‘중고차 시장 유입’이다. 보험 처리를 거치지 않거나, 침수 정도가 크지 않다고 판단돼 개인 수리로 끝난 차량은 침수 이력이 기록에 남지 않을 수 있다. 국토교통부·교통안전공단의 ‘자동차365’나 보험개발원의 ‘카히스토리’를 통해 침수 이력을 확인할 수 있지만, 모든 차량이 100% 걸러지는 것은 아니다.
중고차 업계에서는 침수차를 가려내기 위해 차체 하부와 실내 바닥의 녹·오염 흔적, 안전벨트를 끝까지 당겼을 때 남아 있는 진흙 자국, 퓨즈박스 내부의 부식 여부 등을 점검할 것을 권한다. ECU(전자제어장치), BCM(바디제어모듈) 등 주요 전장 부품의 제조일과 차량 제작 시점을 비교하는 방법도 활용된다. 물로 세척하기 어려운 부위에 새 부품 흔적이 있다면 침수 수리 이력을 의심해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비업계는 “집중호우 이후에는 침수차가 중고차 시장에 섞여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전기차의 경우 배터리 상태를 소비자가 육안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유통 채널과 보증 제도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일부 대형 직영 중고차 업체들이 침수차로 판명될 경우 환불·보상 제도를 운영하는 이유도 이런 위험을 줄이기 위한 장치다.
집중호우와 침수 피해가 반복되는 만큼, 차량 관리에 대한 인식도 전환이 필요하다. 물에 잠긴 차를 “말리고 타면 된다”는 식의 대응은 특히 전기차 시대에는 더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업계에서는 침수 이후의 첫 대응이 차량 수명과 화재·고장 가능성, 운전자 안전까지 좌우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시동 금지’와 ‘전문가 점검’이라는 원칙을 지키느냐가, 피해를 복구 수준에서 멈출지, 사고로 확대할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병문 기자 다른 기사 보기